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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진정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주로 몇시에 잠드는지를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어떤 종류의 노래를 좋아하는 지 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 물들이는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네가 잠드는 시간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선 잠드는지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너를 어떤 느낌으로 적시는지를 모른다. 너를 관통하는 그 모든 느낌들을 나는 장악하지 못한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전부일지 모를 그 느낌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진정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네가 없는 곳에서 너를 진정하고, 너는 내가 없는 곳에서 진정받는다. 그러니까 너를 진정하지 못한다.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진정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일 것이다. 나는 너를 진정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너를 진정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진정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정은 능력이다.
신형철 [시뮬라르크를 사랑해 중 전부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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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보이는 것은 보여서 보임으로 인해서 존재한다. 보이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아서 보이지 않음으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만 보이는 것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은 것들이 잊어 버린다. 잊어 버린다는 말이 맞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무조건 적인 믿음이다.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장악하고 있다.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사랑이 없인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다. 보이는 것에 눈이 멀고 있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붙잡기가 두렵다.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장래의 면류관임을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인가? 보이는 것은 보임으로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길 바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봄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을 쫒아가면 좋겠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이미 보았을 수도 있겠다. 이미 보았는 데도 보여지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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