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을 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달아났다. 선택은 그의 권리였지만 책무이기도 했다. 그는 책무를 다하지 않은 죄책감을 권리를 포기한 희생과 맞바꿈으로써 자신의 무고함을 확보하려고 했다. 자연스러운 양도가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권리와 책무가 형제에게 떠넘겨졌고, 형제는 그 권리와 책무를 양도하지 않았다.
2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사랑의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도 조절할 수 없다.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사랑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사랑이 무책임하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행사된 폭력이 사랑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리에서 다시 행사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므로[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이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사라져라]그리하여 사랑을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과 사랑의 부재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무슨일이든 하는 사람은 무슨일이든 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일도 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소불위인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무소불위다.
3
후는 원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틀리지 않은 말을 하는 원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말의 내용은 옳지만 말하는 행동은 옳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어떤 옳은 말은 말해지는 순간, 말해졌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된다. 어떤 옳은 말은 옳음을 유지하기 위해 말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으면 그 말이 옳다는 것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하는, 옳지 않은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옳지 않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옳지 않은 실천을 통해서만 그 옳음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누군가의 옳지 않은 실천이 옳은 말때문에 용납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옳은 말이 옳지 않은 실천 때문에 의심스러워지기도 한다.
4
현실과 마주침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그의 무기력을 유발했다. 그는 결단과 선택을 강요할 것이 뻔한 현실에 잘 대응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어떤 결단이나 선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결단이나 선택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결단이나 선택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어떤 결단이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현실의 가학성이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대개 할 수 없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위장이 필요하다. 능력의 문제를 기호의 문제로 바꿈으로써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부담과 죄책감으로부터 달아난다. 대개의 경우 이 시도는 성공하지만, 그러나 이 성공은 현실의 실패가 전제된 명목상의 성공이다. 현실의 실패를 내장한 성공, 그러니까 이것은 기만이고 도피고 거짓 성공이다.
이승우 [지상의노래]
'ulTradowny > 보통의 책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Duft der Zeit. (0) | 2013.11.17 |
---|---|
나는 왜 쓰는가. (0) | 2013.10.14 |
너를 사랑한다는 건. (0) | 2013.08.19 |
색채가 없는 다자키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0) | 2013.08.18 |
환대에 대하여. (0) | 2013.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