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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Tradowny/보통의 책장

사랑후에 오는 것들.












1

나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외에는 누구에게도 해복 적이 없는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그 앞에 서면 이 세상 누군가의 앞에설 때보다 그냥 나였다. 아버지 앞이나 어머니 앞이나 동생 록이 그리고 민준이 앞에 서면 써야 했던 어떤 가면을 나는 그 앞에서는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 그는 가끔은 내 볼을 꼬집으며 침대 속으로 들어와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오늘 하루 쉬면 안 돼? 하면서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는 부지런 했다. 그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한 일이지만 그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슬픔이라는 점령군에게 마음의 영토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고 있던 것도 같았다.



2

나 보고 싶었어? 얼마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준고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진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 버렸다. 보고 싶으냐는 물음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느냐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3

사람이 사는데, 꼭 나쁘다는 것이 존재할까? 더구나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건 말이야.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야. 되돌릴 수도 없는 거. 그냥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고 그러는게 좋지 않겠니?



4

그런데 말이야. 또 가끔은 내가 나쁜 여자였으면 좋겠어. 바람이 차가워서 발이 시렸다. 나도 보라색 털잠바에 손을 찔러 넣었다. 민준이 내 앞으로 어묵 국물을 밀어 주었다.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데...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 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만 더 고통스럽기를....



5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온 우주의 풍요로움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문제는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배반하는 일 같은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에도 유효 깐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사랑의 속성이었다. 우리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의 빛이 내 마음속에서 밝아 질수록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만큼 짙게 드리워진다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나만은 다를 거라고. 우리의 사랑만은 다를 것라고 믿었다. 



6

준고와 내가 함께 이야기하던 결혼은 그런 결혼이 분명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결혼이라기보다는 그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다는 내 열망의 보통 명사였으며 영원히 사랑하자는 말의 다른 이름이었다.



공지영 [사랑후에 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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