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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는 셈이다. 예전의 선생님들은 뭘 그린 건지 알아보기도 힘든 무당벌레 그림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겨놓은 만국기 그림을 보고도 아주 잘 했다고 칭찬해줬지만, 이제는 시험성적이 잘 나와야만 칭찬해준다.
그뿐인가? 주위 사람들에게 모진 조언도 듣게 된다. 물론 그 사람들 딴에는 우리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겠지만, 스스로 돈을 벌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며, 우리가 경제적인 자립을 얼마나 잘해냐느냐에 따라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입 밖으로 꺼내는 말과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에도 신경 써야 한다. 우리의 겉모습 중에 남들에게 반감을 사거나 겁을 먹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면 감춰야 하고, 옷과 헤어스타일에 돈을 써가며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점점 부족하고 어설픈 존재, 부끄러움과 불안감을 가득 담고 있는 존재로 성장해간다. 어른이 되면서 천국에서 완전히 추방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자아는 태어날 때 함께 가지고 나온 원초적인 욕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뭔가를 잘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있는 그래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 몸을 매개로 사랑 받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 자신의 살 냄새로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욕구다. 이 모든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로 인해 이상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혀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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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시의 분야별로 웹사이트들이 더 많이 생기면 어떨까? 몇가지만 예를 들자면, 카디건에 흥분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이트라든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나 책 읽는 모습에 흥분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이트 등이 더 생겨야 한다.
다시 고무 밴드 얘기로 돌아가보자. 남자가 고무 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손목에 차고 있는 고무 밴드가 발랄하고 격의 없으며 중성적이고 힘차 보이기 때문이다. 손목에 그런 고무 밴드를 찬 사람이라면, 최신 유행 스타일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남들이 시시하게 여기는 낡고 소박한 것에도 깊은 관심을 보일 만큼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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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섹스 후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경우는 꽤 흔한 일이다. 한쪽, 혹은 두 사람 모두 곯아떨어지거나, 신문을 읽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쉽다. 대체로 이럴 때 문제는 섹스 그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섹스와 일상의 현격한 대비가 문제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괘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측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하다.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비참한 기분에 젖어드는 것이다.
사랑은 나누는 동안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은 우리의 마음속 열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행위는 서로의 성기를 마찰시키는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흥분은 천박한 생리학적 반응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느끼게 되는 엑스터시다. 그 특별한 누군가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줌은 물론이요, 공통된 가치관을 바탕으로 삶을 나누는 것까지도 함께 꿈 꿀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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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링거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성장하면서 내면의 무언가가 결여되기 마련이다. 부모님이나 성장환경이 늘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거기에서 저마다 나름의 좌절을 경험하고, 어느 부분이 취약하거나 불안정한 상태로 성격이 형성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약점과 결함이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갖는 호감과 반감의 취향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미술 작품에는 특유의 심리학적, 도덕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그림에 따라 평온하거나 불안하거나, 과감하거나 조심스럽거나, 절제되거나 대담하거나,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고상하다. 이런 여러가지 특징들 중에서 우리가 어떤 분위를 선호하는지를 살펴보면, 우리의 심리적 내력이 거기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내면의 취약한 부분이나 결핍된 요소가 무엇인지에 따라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의 결함을 보상해주고 건강한 상태를 되찾도록 도와줄만한 속성이 담긴 작품을 갈망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술 작품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결여되어 있는 특정한 속성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이 심리적으로 결핍된 가치를 채워줄 때 우리는 그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반면 위협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나 고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을 대할 때는 '보기싫다'는 반감이나 거부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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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의 이유는 훨씬 더 단순하고 덜 우울하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우리의 외모는 우리 자신의 내적 자아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평가의 신호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제는 그런 낙담과 좌절감을 훌훌 털고, 무너진 정신과 자존감을 추슬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사태의 맥락을 좀 더 확장해볼 필요가 있다. 이성으로서 거절당하더라도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안된다. 상대방이 우리의 영혼까지 들여다보고 우리의 모든 면에 대해 혐오스러워한다고 여기지는 말라는 얘기다.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런 못난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덜 우울하다. 거절의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는 단지 우리의 몸에 흥분을 느끼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런 거절은 이성의 힘이 닿지 않는 무의식과 억압된 잠재의식에 따른 판단이므로 이성적으로 바꿀 수 없다. 이런점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위안으로 삼으면 된다.
알랭드 보통 [인생학교,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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