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방에서 나와 밖으로 나갈때면 아직 적응되어지지 않는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늘 여름을 가지고 있는 이 곳에도 나름 가을,겨울이 존재한다는데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이 곳은 언제나 여름일꺼라 생각했다. 새벽에 잠을 설쳤다. 역시 반수면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첫날의 밤보다는 괜찮았던 것 같다. 자기전에 과일을 좀 많이 먹어서 화장실을 몇번 갔던거 에어컨을 껐다켰다 하느냐 몇번 깼던거 빼면 말이다.
희망이 없음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잠시 생각하다 깊게 생각하자 했더니 희망이란게 내 삶에서 희미해져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희미해진 희망' 그래 희미해졌다는 것이 맞겠다. 희망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릴적부터 들어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다는 건 어떤 의지같은 것이 없다는 것, 절망적이라는 것, 미래가 없는 것, 포기한다는 것, 부정적인 것,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죽은인생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라고 배워왔던 것 같다. 이 외에도 많은 뜻으로서의 희망없음을 말하지만 이런 대중적인 희망 없음 말고 나에게 있어서의 희망 없음을 말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있어서 '희망 없음, 희미해진 희망이란' 뭘까? 또 생각하려고 하니 뒤죽박죽이다.
20140101 희망은 없다. 나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닫고 있다. 희망을 갖지 않음에 희망을 갖는다. 희망이라는 것을 배제함으로써 어느 정도 절망을 막을 수 있다. 절망가운데 살지만 절망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절망만으로도 살아가는 희망을 꿈꾼다. 희망이 없지만 희망은 있다.
분명 난 희망 같은걸 그러니까 한 4-5년전엔 가지고 있던 것 같다. 희망 없이 산다는게 그 당신 매우 힘들었으니까 어떤 무한한 희망 같은 것을 품고 살아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고 머릿속에 그 동안 쌓여진 어떤 관념들의 존재가 커지면 커질수록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이 어쩌면 나를 보호하는 장치 중 하나일거라고 여겼다. 그 보호 장치는 슬그머니 그리고 단단하게 내 무의식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희망을 가짐으로써 발생되는 그 후의 것들이(가령 희망함으로써 좋은결과가 일어나는것, 아니면 희망함으로써 나쁜결과를 초래하는 것.)있는데 이 두가지를 아예 차단하는 방법 바로'희망없음'이라는 단어로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때 좋은결과가 생기면 좋지만 나쁜결과를 얻게될 때 자신이 받는 무거운 것을 아예 차단하는 행위가 바로 희망없음을 들어내게 하는 것인거다. 아직도 희미해진 희망을 떠올린다. 난 어떤 희망을 가졌었다. 기억해내보니 이젠 그 희망을 조금씩 이루어낼 시간이 다되간다. 여전히 난 그 자리, 그 곳에 서 있는 기분인데 희망들을 떠올릴 때면 날 한 없이 작게 만드는 무거운 짐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희망을 이야기하다보면 떠오르는 희망의 요건들을 다시 희망할라 치면 보호장치는 여과없이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 낸다. 지금 난 그 보호장치를 부숴야 할지 그대로 두어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희미해진 희망에 초점을 맞춰 쨍하게 들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또 고민하고 있다.
'내 머리의 usb > Thailand: 15F540C' 카테고리의 다른 글
SIAM. Phattanakan 44. (0) | 2014.04.10 |
---|---|
SIAM. 어느곳이든 어떤마음이든 석양은 아름답더라고. (0) | 2014.04.08 |
SIAM. 우울컥. (0) | 2014.04.08 |
SIAM. 밤을 보내고 나면. (0) | 2014.04.05 |
SIAM. 비행기안에서. (0) | 2014.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