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은 조급증과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이타심이라는 위장포를 뒤집어썼다. 예컨대 당신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급조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합리화가 없이는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서 자신을 설득시키거 난 후에야 행동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속이기의 과정인 경우가 더 많다.
2
이별 후에 어떤 물건들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물건들은 어떤 시간을 상기시키고 그 시간 속에서 함께 했던 어떤 사람, 어떤 사연, 어떤 약속을 불러낸다. 물건은 시간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화석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물건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발이 가기 전에 생각이 먼저 그 길을 간다. 그리고 대체로 생각으로 걷는 길이 발로 걷는 길보다 힘들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계명을 내리고,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계명을 기꺼이 지킨다.
사랑은 세상을 축소기키는 기술이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의 세계는 두 사람만 존재하는, 아주 좁은, 이제 막 태어난 세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웃거리지 않는 것은 기웃거릴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그런 것처럼 사랑 역시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한다.
사랑은 우연을 얹으려는 의지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한다. 왜냐하면 우연이 그 사랑에 숙명적인 성격을 주입하기 때문이다.
3
타인을 연민하는 것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연민을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그러나 교활한 수단이라는 걸 당신을 알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타인을 동정한다. 당신이 애처로워지지 않기 위해 누군가가 애처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승우 [욕조가 놓인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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