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ulTradowny/보통의 책장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1

고로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이 무슨 색인지 알고 싶다는 말이며 그 색깔을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눠달라는 말이다. 그 색에 섞이겠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당신 목에 두른 스카프 색깔이 그게 뭐냐고 말하지 않는다.


한 여자를 알았다. 나는 그녀가 빨간색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녀는 파란색이었다. 정반대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한순간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럴 경우, 내가 그쪽으로 옮겨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를 더 만났더니 그녀는 차라리 흰색이었다.   







2

왜 헤어짐의 상태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던 거라고 믿게 하는지를,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게 되는지를, 왜 헤어진 이후로는 정확하지 않은 것만 생각하게 되는지를 모르고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어쩌면 그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버둥거립니다.    







3

사는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거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은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는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하여금 인간을 어려운 일에 빠지게 하는 일, 그것은 신이 하는 일이다. 그 어려움으로 하여 인간을 자라게 하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 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만 행복으로 건너갈 자격을 얻는다. 신이 어떠한 장난을 친대도 사랑을 피할 길은 없다. 그냥도 오고 닥치기도 하는 것이고 누구 말대로 교통사고처럼도 오는 것이다. 사랑은, 신이 보내는 신호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게 한다. 그것도 신이 하는 일이다. 죽도록 죽을 것 같아도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게 한다. 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은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완성이다. 인간적으로 우리 사랑을 하자. 인간의 모든 여행은 사랑을 여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안에서 여행하게 되어 있다. 사랑을 떠났다가 사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랑은 삶도 전부도 아니다. 사랑은 여행이다. 사랑은 여행일 때만 삶에서 유효하다. 

 








4

하지만 세상 어디에 완성이 있을까. 그래도 혼자인 것을 잘 견디며, 쓸쓸한 저녁을 잘 이해하고, 밤 불빛을 외로움이 아닌 평화로움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면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한때를 완성한  것 아니겠는가.









5

나이 먹는 일에 대해 생각한 것은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만 있고, 나이 없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어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로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6

당신과 처음으로 향한 먼 곳이었다. 어떤 도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혼자 소호에 있다. 그때 당신관 내가 머물던 호텔의 건너편이다. 새벽녘 저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머리를 내고 담배를 피우던 기억. 담배를 피우는데 어디선가 커피향이 몰려와서 주방에 전화를 걸어 아침을 시켜 먹던 기억. 그때는 바깥으로 이 거리가 있는 줄 몰랐다. 그때는 그 작은 방 안에 당신과 모든 것이 엉켜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신발은 사주었었다.


당신 혼자 며칠 더 머물러야 했다. 내가 며칠 먼저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신던 신발을 버리고 갈 거냐고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오래 신어서 버려야 마땅한 신발이었다. 아주 어려웠던 때 사 신은 신발이라 버리기 뭐했지만 버리겠다고 했다. 뭐든 다 끌어안고 살지 말고 조금씩 버리고 살라는 당신의 말을 듣고 싶어서였겠다. 아마도...

가방을 싸면서 낡은 신발을 휴지통에 버리려 하는데 당신이 말했다. 


"거기 한쪽에 두고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이병률[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ulTradowny > 보통의 책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찬란.  (0) 2012.12.23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0) 2012.12.23
타인에게 말걸기.  (0) 2012.08.15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 였다.  (0) 2012.07.26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0) 2012.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