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가 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로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글을 쓸수록 문학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느낀다. 희망이 내 속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나 또한 희망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면 나로서도 행복하겠다. 문학은 삶의 문제에 뿌리를 두게 되어 있고, 삶의 문제는 옳은 것과 희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과 불행에 더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희망 없는 불행 속에 놓여 있어도 살아가야 하는 게 삶이질 않은가. 때로 이 인식이 나로 하여금 집도를 포기하게 한다. 결국 나는 하나의 점 대신 겹겹의 의미망을 선택한다. 할 수 있는껏 두껍게 다가가자고, 한겹 한겹 풀어가며 그 속에서 무얼 보는가는 쓰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고,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라고, 열 사람이 읽으면 열 사람 모두를 각각 다른 상념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게 좋겠다고, 그만큼 삶은 다양한 거 아니냐고, 문학이 끼어들 수 없는 삶조차 있는 법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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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오후 다섯시. 나는 그 오후 다섯시를 사랑했다. 그 시간이면 이제 컨베이어 앞을 떠나도 되므로. 우릉우릉 컨베이어 돌아가는 소리, 에어드라이버 돌아가는 소리, 뿌지직 납땜 연기 솟아오르는 소리로 가득찬 생산현장을 걸어나올 수 있었음으므로, 현장 바깥 남자 화장실 옆에 있는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거나 조금 후에 탈의실에서 교복으로 갈아입는 중이면 국기 하강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흘러나온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니님이 보우하사...... 문득 걸을음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가 있는 쪽을 바라보던 1979년의 오후 다섯시. 식당에서 내주는 찬밥으로 저녁을 먹고 버스를 타고 공단을 벅어나 학교에 갔던 오후 다섯시. 우리를 학교가 있는 신길동에 내려주는 버스 안내양의 손엔 주사위만한 영어 단어장이 쥐어져 있기도 했던 오후 다섯시.
신경숙 [외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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